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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병민 님 개인전
등록일   08-12-09 19:40 조회수   8155

응시

최병민展 / CHOEBYOUNGMIN / sculpture

2008_1210 ▶ 2008_1216



최병민_오름 05_에폭시_44×24×12cm_2005




초대일시_2008_12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모란갤러리_MORA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www.moranmuseum.org






투명한 인간, 그 아름다움에의 獻辭 - 최병민의 근작「응시」에 대하여 ● 하늘을 경배하듯, 땅을 위무하듯, 해를 마주하듯, 비와 바람을 부르듯, 신을 맞이하듯, 운명을 바라보듯 경건하게 서 있는 사람. 머리와 어깨 팔에는 구름, 해, 달, 번개 등을 이고 두 발은 가지런히 대지를 딛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도 강인한 육체, 절제되고 고요한 동작, 시대와 공간을 구별하는 의복이나 배경이 없는 나신의 직립. 거기에 부드러운 바람이 일며 스치는 듯, 그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 최병민의 2003년 이후 근작은 바로 이런 사람, 대체로 남성이다. 과거에 그가 묘사했던 인체와는 사뭇 다르다. 농경적 샤먼, 노동, 놀이, 춤, 제의 등의 소재들은 여전하지만 인체를 다루는 방식은 달라졌다. 뼈만 남았던 인체는 부드러운 살갗과 강건한 근육으로 덮여지고, 움직임과 기울임이 컸던 다채로운 동작의 변화는 직립의 수직으로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팔의 동작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도 움직이지 않는 굳건한 하체에 의해 안정적이다. 여전히 신화적인, 그러면서도 경건한 느낌이 극대화 된다. 정지(停止). 시간은 흐르되 동작은 멈추어진 상태. 그 멈춤은 스스로의 의지 혹은 의례 때문인 듯 다분히 의도적인 자세다. 사람이 이런 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인데 의전(儀典), 의식(儀式)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동작이라 하겠다. 무거운 분위기의 어떤 중압감, 수도승 같은 비의(秘儀)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 사실 이런 자세나 느낌은 과거 구작에서도 일정부분 보였던 것이다. 1992년 금호미술관과 1995년 나무화랑에서 열렸던 최병민의 개인전에서의 역동적이고 활발했던 자세들 사이로 몇 몇 작품에서 바로 이런 의식에 참여한 사람의 정지된 긴장감과 절제된 경건함을 볼 수 있었다. 「음복 飮福」1991,「충견 忠犬」1991,「평화 平和」1991 등과, 그 후부터 2003년까지의 작품 중 「감感」,「손」,「평화Ⅱ」과 같은 작품이었는데, 거기에 연장된 듯 보이는 근작에서는 직립의 동작에서 더욱 동세를 제거한 단순함으로 이 긴장감은 증폭된다. ● 최병민 근작의 특징은 이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설명이나 서술을 배제한 인체의 동작. 완벽한 해부학적 기초에서 필요 없는 살과 군더더기의 제거. 원하는 표정만을 남긴 채 여타의 감정들을 소거한 얼굴구조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핵심적 형상성. 그러니까 최병민은 그가 설정한 주제에 대한 접근을 위해 조각을 구축하기 보다는(비록 소조적 방식을 택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정리를 끝낸 인간과 인체를 위해 필요 없는 부분을 거세함으로 그가 의도한 주제로 나아가는 방법을 구사한다. 이 때 조각언어는 명료해지고 내용과 형식이 하나에 이른다. 프랙탈 이론처럼 거기에는 인간의 정신이 확장되어 우주가 되고 우주와 자연이 축소되어 인체가 되기도 한다.




최병민_응시 03-07_브론즈_50×29×19cm_2003


그곳에는 형상과 공간의 압축이 빚은 상징의 긴장감이 흐르고, 그 상징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을 넘어서는 인간의 원형적, 혹은 본질적인 존재성에 관한 것이다. 상식·역사·기록 등에 의한 합리적 구체성보다는 신화·전설·상상·유추 등이 빚은 카오스적이고 샤머니즘적 시각으로 자연과 관계하면서 빚어지는 인간과 문화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하겠다. ● 그런데 이런 내용이 돌출해내는 풍토성은 넓은 의미에서의 오리엔탈리즘, 그 중에서도 역사시대 이전 동북아시아 전체 문화의 냄새처럼 느껴진다. 물론 최병민의 작업에서 이런 점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거나 예시된 적은 없다. 그러나 몇 몇 작품에서 보이듯 옛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연계된 제목「아사달」에서, 또는 인물두상을 묘사한「응시 03-07」2003 에서 드러나는 북방계형의 골격-가늘게 찢어지며 눈꼬리가 위로 치우친 눈, 가늘고 높은 코와 얼굴형, 얇은 입술-등은 고대 한반도의 북쪽과 현재 중국의 동북삼성인 요동, 간도, 북간도 지역 등을 무대로 유추케 한다. 고조선, 말갈족, 여진족…등, 국경이 모호한 시대 북방 대륙전체를 넘나들며 숱한 부족들의 공통적 신화나 전설 등에 바탕 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고대문화 냄새로 말이다. ● 과거 동양에서는 우주구성의 인자로 天·地·人을 꼽았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은 추상이자 공기 가득한 대기(大氣)인 비어 있는 하늘. 구체적으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물리적 토대인 대지(大地), 견고한 땅.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생명, 사람이 있다. 사람은 하늘(陽)의 기운과 땅(陰)의 흙이 서로 조화되고 버무려져진 육신으로 표상된다. 반대로 죽음은 그 육신이 정신과 분리되는 현상이다.




최병민_응시 달밤 08-04_브론즈_98×70×40cm_2008


하늘로 돌아가는 정신은 혼(魂)이고 땅으로 돌아가는 육신은 백(魄), 즉 살아 있을 때 붙어있던 혼백(魂魄)이 죽음으로 갈라진다는 것. 최병민의 사람은 이 혼백이 분리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육체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살아 있었던 시간이 얼마나 아득한지 그 몸에 별자리와 산과 강이 박히고 새겨졌다(‘응시’연작). 마침내는 시간의 퇴적으로 망부석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육체. 뼈와 살이 흙과 바위와 같아지고 거기에 켜켜히 박힌 숱한 전설과 이야기, 그리고 묵언. ● 육체가 대지와 흙으로부터 와서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한 자연관이다. 이는 흙으로 사람을 빚은 창조론과도 같은 맥락이다. 구약 창세기가 수메르문명에 기반 한 서양의 창조신화라면, 고대 동양에도 이런 신화가 있다. "산해경 山海經"에 등장하는 반고(班固)의 천지창조와 이어지는 서왕모, 복희, 신농, 여와 등의 삼황오제 신화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여와’는 진흙으로 남녀 사람형상을 빚고 입으로 숨결을 불어넣어 마침내 사람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우주, 자연, 사람, 그리고 뭇 생명들이 통일되는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대륙의 서쪽 끝 곤륜산에서부터 동해바다 끝까지 공통적인 신화의 뿌리다. 서쪽으로부터 유래한 한족(漢族)과 동쪽의 동이족(東夷族)이 그 신화를 구성하는 분모들이다. 최병민의 작업은 바로 이 고대 동이족 전체로부터 고조선의 건국신화, 그리고 여타 고대국가나 부족들의 설화 등 우리문화의 원형에 상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증적인 역사학의 방식보다는 무언가 크고 분명치 않은 느낌, 이미지, 유추 등을 버무림으로 인해 모호하면서도 커다란 흡입과 울림이 거기에서 발생한다. ● 신화와 전설은 문자시대 이전 일상성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서사이다. 비유와 은유가 기록(역사)을 대신한다. 이 고대의 서사적 사건과 시공간을 상상의 무대로 하여 최병민은, 마치 사람을 만든 조물주 ‘여와’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그의 입장을 흙의 붙임·빚음·떠냄·문지름으로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창조된 그들은 원시시대 이후 문명을 처음으로 맞이할 때의 정명(正明)의 정신과 지혜로움, 아름답고 건장한 육신을 가진 순수한 인간형이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건한 대면과, 그 자연에 내재된 정령과, 사람사이를 주술로 중개하는 샤먼(Saman) 혹은 무격(巫覡)의 초월적 현실성이 최병민의 조각에서 정지되어 긴장된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신화인지 어떤 전설인지 그 소재가 중요하지는 않다. 조각은 그런 소재들을 서술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형상화하는 질료, 형식, 분위기, 상징이 중요하다.




최병민_응시 08-01_브론즈_78×35×33cm_2008


최병민 조각의 미덕은 바로 그만의 조각적 형식과 더불어, 넓고 광대한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인체에 축약해 내는 침묵의 음유(吟遊)와 은유(隱喩)의 발성법과 표현법이다. 소급해 보자면 그 침묵은 작품인물에서의 감각기관인 눈과 입의 생략과도 마찬가지로 일맥상통한다. 그 중에서도 눈의 약화와 입의 생략은 최병민 작품 읽기의 중요한 모티프를 제공한다. 묘사되어 있으나 흐리게 처리된 눈은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의 방향과 표정으로 작품의 주요 포인트가 된다. 눈은 무언가를 보는 감각기관이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 사물이 저절로 보이기도 한다. 의식/무의식적 감각/지각행위이자 능동/수동을 아우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병민의 작품에서의 눈은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凝視’라는 제목처럼 의식적인 바라보기 혹은 관찰이다.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앎의 의지, 즉 지혜를 구하는 행위다. 거기에는 올바로 봄과 올바로 인식하려는 인간의 지혜를 향한 원형적 본능이자 의지가 전제된다. ● 눈에 비하면 입은 아예 묘사되어 있지도 않다. 봉인된 입. 말에 대한 절제, 혹은 묵언. 말을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화자의 의지가 있을때라야만 가능하다. 감탄사나 비명 등을 제외한 말은 상호소통을 단서로 한다. 이성적 행위란 것이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어딘가 집중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언가를 응시하며 거기에 눈이 몰입되어 있을 때, 그리고 그 대상과 현상을 분석하고 알고자 애쓸 때 말은 필요치 않다. 오히려 깨우침에 방해가 된다. 깨우친 이후의 말은 지혜가 되지만 깨우치기 전의 말은 군더더기다. ● 바로 이 때의 응시는 세계와 현상이 인간의 지식에 의해 개념화되기 이전 원초적 상태에서의 인지작용을 의미하기도 하며, 또 개념에 의해 사람의 순수한 감성과 인식이 방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최병민 조각의 이 묵언(默言)을 수행하는 사람이 순수한 상태의 인간형이라거나-춤과 놀이와 사유와 노동을 하는 형상들-세계와 존재에 대한 직관적 깨우침을 지향하며 제의에 참가한 수행자나 예지자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되지 않고 진리를 구하는 이들은 현자(賢者)다. 그런 현자의 침묵이 절제된 조각형식을 통해서 체현되어 나올 때 소재인 사람과 작가의 정신성이 동시에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최병민_응시 08-02_브론즈_87×53×31cm_2008


인체에 대한 최병민의 접근과 표현은 안구의 궤적에 의존하여 대상을 분석하고 재현하는 서구의 모방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최병민의 소조기법은 인체를 사실적으로 모델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사실성을 약간씩 흔들면서 오히려 ‘묘사’에서 벗어나오는 비틀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조각형식에 새로운 지각적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표정의 생략, 극적인 동작, 고대 시제로 돌린 원시적 이미지 등 좀처럼 관찰에 의존하는 재현적 리얼리티는 별로 없다. ● 다만 거기에서 나타나는 인체는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한국인의 몸을 만들고자 하는 최병민의 미적 의도가 수반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구축된 형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육체라는 물리적 조건이나 형태에 앞서 작가에게 내재된 정서, 느낌, 의지, 감성, 생각 등을 단번에 드러내는 정신에 대한 ‘형상성’이다. 대상을 통해 작가의 내면, 혹은 정신성을 표출하는 행위는 결국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성찰의 결과이며 최병민이 궁극적으로 인물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이기도 하다. ● 이런 인물에 대한 조형적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동양화의 초상화 미학인 ‘전신사조(傳神寫照)’가 있다. 전신사조는 작가의 내면보다는 대상인 인물에 내재된 성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정신이나 품격을 온전히 담아내더라도 반드시 대상과 그 외형이 닮아야 한다는 응물상형(應物象形)의 전제가 있다. ● 그렇지만 이는 최병민 작업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최병민 조각의 인물은 구체적으로 이름이 붙는 특정인이 아니라 익명의 ‘누구’일 뿐이다. 때문에 각각 대상의 특징이 없을뿐더러 그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분석할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전신사조의 미학, 즉 특정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히려 철저하게 익명의 사람들, 혹은 누구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집단적(문화적) 전형성의 기호, 혹은 표지에 가까운 인체다. 그들은 놀고, 춤추고, 노동하고, 의례를 갖추는 동작을 취할 뿐이다. 삶과 인간과, 자연(우주)에 대해 신성함과 경건함, 예의와 존경, 평화를 구하는 것은 작가 최병민이다. 그래서 최병민이 만들어 낸 이 인체들은, 현대인들의 실존에 대한 불안·고독·갈등·소외·욕망 등에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원초적 인간상이라 하겠다.




최병민_응시 06-05_브론즈_78×37×30cm_2006


그런데 문제는 최병민의 작품에서의 이런 인간형이 현실에서의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로지 최병민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인간관의 기의(記意)이자 미적 기표(記票)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런 상상공간과 상황, 인간형의 제시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부재한 현실을 강조하게 된다. 애석한 일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내밀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성경의 구절은 그러나 실재로는 실현 불가능한 현실의 패러독스이기에 더 고귀하게 느껴지듯이, 최병민이 설정한 인간에의 숭고한 가치도 지금 존재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이 현실적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최병민이 제공한 육체와 정신의 싱싱한 건강성의 크기에 반비례하는 절망을 동시에 맛본다. 그래서 마치 그의 조각에 등장하는 구름처럼, 아름다움의 부재와 그를 갈구하는 모순은 더욱 우리의 마음에서 안타까운 길항작용을 한다. ● 사라졌거나 실재하지 않는 것에의 동경은 아름답되 비극적이다. 최병민 조각의 이 아름다운 그로데스크도 지금은 부재한 순수했던 인간형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증폭시킨다. 거기에 선과 악, 현재와 과거, 개인과 공동체, 절제와 욕망, 아름다움과 추함 등의 이분법적인 단순함을 넘어서는 최병민 작업의 너비가 있다. 비이성적이고, 설화적이며, 먼 과거에 시제를 두는 등 비록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지 않지만, 소통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늘 우리들의 삶과 세상살이에 대한 반성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최병민의 조각은 그의 관념에만 존재하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과거 사이에서 질긴 상징의 끈을 맞당기고 있는 것이다.




최병민_응시 06-09_브론즈_76.7×60×24cm_2006


물리적 형태, 구조, 질감과 작가 내면의 인간존재에 대한 지향성으로 근작에서 최병민은 완벽하게 우주와 하나가 된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다. 지방질을 제거한 늘씬한 몸매에 유려하면서도 강인한 몸. 거기에서 발생하는 발랄한 상쾌함, 심오한 존재에의 성찰, 질기디 질긴 생명에의 의지, 우주로까지 확대되는 고대인들의 기원과 에너지, 그리고 명증한 인간정신에의 고양은 우리들이 앞으로 지향코자 하는, 혹은 회귀코자 하는 과거의 능동적인 인간상에 다름 아니다. 이는 최병민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던 죽음에의 의지나 공포를 역전시키는 포지티브한 생명성이 주는 맛이다. 고요함·경건함·숭고함·진지함 등 마음에 내려앉는 미적 분위기의 통일이 주는 맛은 더욱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신명과 거룩한 상징을 이끌어 낸다. ● 최병민의 작품 모두가 집합하면 고대의 축제처럼 보일 것 같다. 농경시대 춤과 놀이와 무예와 제사 등, 축제가 맞다. 고조선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처럼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자 땅에서는 기쁨을 누리는 행사. 하늘에 사람의 춤을 바치고, 북을 두드리며, 모두가 하나처럼 경계 없이 평화를 기원하는 이 행위들은 개인을 전체로 확대시키며 하나의 문화, 공동체의식을 만들어 낸다. 이때 축제는 사람을 들뜨게 하면서도 순수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지나간 삶의 궤적에 대해 반성을 요하는 시간이자 더 희망적인 앞날과 세상살이에 대한 의지를 다듬는 시간이 기다린다. 일상이다. ● 최병민이 상상하고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 축제와 같은 세계와 일상이 통일되는 세상의 인간이다. 작가에게는 관념적인 상상을 옮긴 행위에 지나지 않겠지만, 최병민의 작품을 보고 느끼는 소통과정에서 설득력이 발생한다면 이 주관적 관념은 객관적 리얼리티로 전환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았다.- 고대든 현대든 사람 사는 것에 대한 생각과 기원이 다르지 않을 터, 하물며 최병민의 상상과 생각과 작업과정이 상징, 조형, 미감 등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에 오롯이 들어앉음에랴. 언어적 개념이나 명제로 두드러지지 않고 모호하게 감지/감촉되는 최병민 조각의 궁극적인 주제와 가치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지금은 부재한 ‘순수하고 지혜로운 인간’에 대한 꿈, 그런 꿈의 투명한 표지(標識), 혹은 헌사(獻辭)로서의 조각에 대한 믿음 말이다. ■ 김진하

Vol.081210b | 최병민展 / CHOEBYOUNGMIN / sculpture